제1차 보어 전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1차 보어 전쟁은 1880년부터 1881년까지 영국과 남아프리카의 부어인(보어인)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영국은 남아프리카 확장을 위해 트란스발을 병합하려 했으나, 부어인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전쟁은 부어인들의 게릴라 전술과 영국군의 지휘, 정보 부족으로 영국이 여러 차례 패배하면서, 결국 영국의 휴전 제안과 프레토리아 조약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이로 인해 트란스발은 영국의 종주권 하에 자치를 인정받았지만, 1884년 런던 조약으로 완전한 독립을 쟁취했다. 이후 위트워터스랜드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영국과 트란스발 간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고, 이는 제2차 보어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80년 분쟁 - 태평양 전쟁 (남아메리카)
1879년부터 1883년까지 칠레, 페루, 볼리비아가 아타카마 사막의 구아노와 초석 광산 지대 소유권을 두고 벌인 태평양 전쟁은 칠레의 승리로 끝나 칠레는 남미 강국으로 부상하고 페루와 볼리비아는 경제적 어려움과 영토 손실을 겪었으며, 이는 남미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보어 전쟁 - 남아프리카 연방
남아프리카 연방은 보어 전쟁 이후 네덜란드계와 영국계의 화합을 위해 건국되었으며, 영국 군주를 국가 원수로 하는 자치령이었으나 1934년 주권 국가가 되었고, 행정 수도 프리토리아, 입법 수도 케이프타운, 사법 수도 블룸폰테인으로 구성되었으며, 1961년 국민투표를 통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 보어 전쟁 - 코만도
코만도는 보어 기마 부대에서 유래된 용어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육군 코만도가 현대 특수부대의 효시로 여겨지며 세계 각국 특수부대 창설에 영향을 주어 특수부대 또는 특공대를 의미하는 일반 명칭으로 사용된다. - 1881년 분쟁 - 태평양 전쟁 (남아메리카)
1879년부터 1883년까지 칠레, 페루, 볼리비아가 아타카마 사막의 구아노와 초석 광산 지대 소유권을 두고 벌인 태평양 전쟁은 칠레의 승리로 끝나 칠레는 남미 강국으로 부상하고 페루와 볼리비아는 경제적 어려움과 영토 손실을 겪었으며, 이는 남미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 1881년 분쟁 - 프랑스의 튀니지 정복
프랑스의 튀니지 정복은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하여 보호령으로 삼은 사건으로, 알제리 인접 지역 지배력 강화, 이탈리아와 영국의 영향력 견제를 위해 군사적 침공을 통해 이루어졌다.
제1차 보어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제1차 보어 전쟁 |
다른 명칭 | (아프리칸스어: 제1차 자유 전쟁) First Freedom War (영어: 제1차 자유 전쟁) |
일부 | 보어 전쟁 |
기간 | 1880년 12월 20일 – 1881년 3월 23일 (3개월 3일) |
장소 | 남아프리카 공화국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
결과 | 보어의 승리 프레토리아 협약 체결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영국의 종주권 하에 자치권을 회복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남아프리카 공화국 |
교전국 2 | 대영제국 나탈 식민지 트란스발 식민지 |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피트 주베르트 니콜라스 스미트 프란스 주베르트 피트 크로녜 |
교전국 2 지휘관 | 윌리엄 글래드스턴 조지 포머로이 콜리 월터 롱 윌리엄 벨레어스 조지 F. 길데아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
교전국 2 병력 | |
사상자 | |
교전국 1 사상자 | 41명 사망, 47명 부상 |
교전국 2 사상자 | 408명 사망, 315명 부상 |
전투 목록 | |
주요 전투 | 프레토리아 브론코르스트스프루이트 러스텐버그 마라바스타드 라이덴버그 엘란츠폰테인 레인스넥 스쿠인스호흐테 로이후이스크랄 마주바힐 |
관련 정보 | |
![]() |
2. 역사적 배경
19세기 영국은 인도와의 무역로를 희망봉을 통해 장악하고, 1868년 킴벌리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으며, 다른 유럽 열강들과 아프리카 지배 경쟁을 벌이면서 남아프리카 확장을 가속화했다.
블라우버그 전투(1806) 이후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 네덜란드로부터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공식적으로 획득했다.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정착 농민(부어)들은 영국의 통치에 반감을 가졌지만, 어느 정도 경제적 이익을 얻기도 했다. "트렉보어"(말 그대로 "여행하는 농민")로 알려진 부어 농민들은 처음에는 케이프에서 네이탈을 향해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그 후에는 내륙을 향해 북쪽으로 이주하여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발 강 건너편) 공화국을 세웠다.
영국은 1852년 샌드 강 협약으로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1854년 블룸폰테인 협약으로 오렌지 자유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나 1830년대부터 영국의 식민지 확장은 부어인 및 원주민 아프리카 부족과의 충돌과 전쟁을 야기했다.
1867년 발 강 부근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내륙에 고립되었던 보어인들의 상황과 남아프리카의 역사가 바뀌었다. 이 발견은 다이아몬드 러시를 촉발하여 킴벌리를 5년 만에 5만 명의 도시로 만들었고, 영국의 관심을 끌었다.
2. 1. 영국의 남아프리카 확장 정책
19세기 영국은 희망봉을 통한 인도와의 무역로 장악, 1868년 킴벌리 다이아몬드 발견, 그리고 다른 유럽 열강과의 아프리카 지배 경쟁 등의 이유로 남아프리카 확장을 추진했다.[2]1877년 트란스발 병합은 영국의 남아프리카 침략 중 하나였다. 1868년 영국은 바수토랜드(현재 레소토)를 병합했는데, 이는 소토족 지도자 모쇼에쇼 1세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1880년대 츠와나 지역은 분쟁 대상이 되었고, 영국은 1885년 베추아날랜드를 베추아날랜드 보호령(현재 보츠와나)와 영국령 베추아날랜드로 나누어 병합했다.[2]
블라우버그 전투(1806) 이후 영국은 1815년 네덜란드로부터 희망봉을 공식 획득했다. 네덜란드계 정착민(부어)들은 영국 통치에 반감을 가졌지만, 경제적 이익도 있었다. 트렉보어로 알려진 부어 농민들은 동쪽과 북쪽으로 이주하여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 공화국을 세웠다.[2]
영국은 트렉보어들의 이동을 막지 않았고, 1843년 네이탈을 병합했다. 1834년 영국 제국의 노예 제도 폐지 이후, 더 조직적인 부어 정착민 집단이 영국 통치에서 벗어나려 했고, 이를 대이주, 참여자들을 보어트레커라고 불렀다.[2]
영국은 1852년 샌드 강 협약으로 트란스발 공화국, 1854년 블룸폰테인 협약으로 오렌지 자유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나 1830년대부터 영국의 식민지 확장은 부어 및 원주민과의 충돌을 야기했다.[2]
1867년 발 강 부근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다이아몬드 러시가 시작되었고, 킴벌리는 5년 만에 5만 명의 도시가 되었다. 1870년대 영국은 웨스트 그리쿠알란트를 병합했다.[2]
1875년 영국 식민지 장관 카나본 백작은 영국과 부어 영토 연방을 제안했지만, 부어 지도자들은 거절했다. 1877년 영국은 트란스발을 병합했다.[2] 당시 트란스발 공화국 대통령은 T.F. 버거스였고, 재정 문제와 페디족과의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2]
카나본 경은 테오필러스 셉스톤 경을 트란스발에 특별 대표로 파견했고, 1877년 4월 12일 트란스발 병합 선포가 이루어졌다. 트란스발은 트란스발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폴 크루거 등의 대표단이 런던에 가서 항의했지만 실패했고, 1880년 자유당 정부가 들어섰지만, W.E. 글래드스톤 총리는 트란스발에 대한 영국의 통제를 재확인했다. 1880년 10월, 케이프 식민지 신문은 "비폭력 저항은 이제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2]
2. 2. 부어인의 이주와 정착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은 블라우버그 전투(1806)를 통해 네덜란드로부터 희망봉을 공식적으로 획득했다.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던 정착 농민인 부어인들은 영국의 통치에 반감을 가졌지만, 영국의 통제는 어느 정도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트렉보어(문자 그대로 "이주하는 농민")로 알려진 부어 농민들은 케이프에서 네이탈을 향해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그 후에는 내륙을 향해 북쪽으로 이동하며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문자 그대로 "발 강 건너편") 공화국을 세웠다.영국은 트렉보어들이 케이프를 떠나는 것을 막지 않았다. 트렉보어들은 개척자 역할을 하며 내륙을 개척했고, 영국은 점차 케이프에서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통제를 확장하여 1843년 네이탈을 병합했다.
트렉보어들은 농민이었고, 전반적인 목표 없이 점차적으로 그들의 범위와 영토를 확장했다. 1834년 영국 제국에서 노예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자, 더 조직적인 부어 정착민 집단이 영국 통치에서 벗어나 모잠비크까지 북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을 보어트레커라고 불렀다.
영국은 1852년 샌드 강 협약을 통해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1854년 블룸폰테인 협약을 통해 오렌지 자유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나 1830년대부터 영국의 식민지 확장은 부어인 및 원주민 아프리카 부족과의 충돌과 전쟁으로 이어졌다.
2. 3. 다이아몬드 발견과 영국의 개입
1867년 발 강 부근, 케이프타운에서 북동쪽으로 약 약 885.14km 떨어진 곳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내륙에 고립되었던 보어인들의 상황과 남아프리카의 역사가 바뀌었다.[2] 이 발견은 전 세계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다이아몬드 러시를 촉발하여 킴벌리를 5년 만에 5만 명의 도시로 만들었고 영국 제국의 관심을 끌었다.[2] 1870년대에 영국은 킴벌리 다이아몬드 발견지인 웨스트 그리쿠알란트를 병합했다.[2]1875년 영국 식민지 장관인 카나본 백작은 영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로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 공화국에 접근하여 1867년 캐나다의 프랑스와 영어권 지역 연방을 모델로 한 영국과 보어 영토의 연방을 조직하려고 했다.[2] 그러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완전히 달랐고, 보어 지도자들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2] 이후 영국의 병합, 특히 웨스트 그리쿠알란트의 병합은 부어 공화국에 불안감을 조성했다.[2] 1877년 영국은 파산하고 줄루족의 위협을 받고 있던 트란스발을 병합했다.
3. 전쟁의 발발
줄루족과 페디족의 패배 이후, 트란스발 부어들은 1877년 영국의 트란스발 합병에 대해 점점 더 불만을 표출하며, 이것이 1852년 샌드 강 협약과 1854년 블룸폰테인 협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항의하였다.
소장 조지 포머로이 콜리 경은 잠시 인도로 돌아간 후, 1880년 7월 네이탈 총독, 트란스발 총독, 남아프리카 고등판무관 및 군사 사령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콜리 경은 여러 임무 때문에 트란스발을 방문할 수 없었고, 부어들의 정서나 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행정관 오웬 래니언 경의 보고에 의존했다. 래니언 경은 1880년 12월에 군대 증원을 요청했지만, 이미 상황은 악화된 뒤였다.
1880년 12월 16일, 부어들은 반란을 일으켜 브론크호르스트슈프루이트에서 프레토리아로 증원되던 94 보병 연대의 영국군 부대를 공격했다.
3. 1. 트란스발 합병과 보어인의 저항
줄루족과 페디족의 패배 이후, 트란스발 부어들은 1877년 영국의 트란스발 합병에 대해 점점 더 불만을 표출하며, 이것이 1852년 샌드 강 협약과 1854년 블룸폰테인 협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항의하였다.[1]소장 조지 포머로이 콜리 경은 잠시 인도로 돌아간 후, 1880년 7월에 네이탈 총독, 트란스발 총독, 남아프리카 고등판무관 및 군사 사령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여러 임무 때문에 콜리 경은 트란스발을 방문하여 현지 사정을 파악할 기회가 없었다. 그는 부어들의 정서나 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행정관 오웬 래니언 경의 보고에 의존했다. 래니언 경은 뒤늦게 1880년 12월에 군대 증원을 요청했지만, 이미 상황은 악화된 뒤였다.
부어들은 1880년 12월 16일에 반란을 일으켜 브론크호르스트슈프루이트에서 94 보병 연대의 영국군 부대를 공격했다. 이 부대는 프레토리아로 증원되던 중이었다.
3. 2. 브롱크호르스트슈프루이트 전투
1880년 12월 20일, 영국군 필립 로버트 안스트러 중령과 제94 보병 연대(코노트 레인저스) 소속 병사들은 프레토리아에서 일어난 부어르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브롱크호르스트슈프루이트 근처에서 부어르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첫 발포 후 수 분 만에 약 120명의 영국군이 부어르군의 사격으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반면 부어르군의 피해는 사망 2명, 부상 5명으로 경미했다.주로 아일랜드 병사들로 구성된 제94 보병 연대는 안스트러 중령의 지휘 아래 프레토리아를 향해 서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레토리아에서 약 61.15km 떨어진 브롱크호르스트슈프루이트에서 부어르 코만도 부대에 의해 저지당했다. 부어르 지도자인 프란스 요베르트(코만단트, 프랑수아 게르하르두스 요베르트, 피에트 요베르트 장군의 형제)는 안스트러와 그의 부대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이 지역이 다시 부어르 공화국이 되었으므로 영국군의 추가 진격은 전쟁 행위로 간주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안스트러 중령은 이 경고를 거부하고 병사들에게 탄약 분배를 명령했다. 이에 부어르군은 즉시 발포했고, 매복에 걸린 영국군은 궤멸되었다. 이어진 교전에서 영국군은 56명이 사망하고 92명이 부상을 입는 큰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상황에서, 죽어가던 안스트러 중령은 결국 항복을 명령했다.
4. 1880-1881년 전투
전쟁의 발단은 피에트 베주이덴하우트라는 보어인이 불법적으로 부풀려진 세금을 내기를 거부한 데서 비롯되었다(거하르드민네브론af 참조). 1880년 11월 11일, 정부 관리들은 그의 마차를 압류하여 경매에 부치려 했지만, 무장한 보어인 100명이 경매를 방해하고 재판장을 폭행하여 마차를 되찾았다. 이들이 뒤쫓아온 정부군과 맞서 싸우면서 전쟁의 첫 포성이 울렸다.
트란스발이 공식적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후, 1880년 12월 16일 포체프스트룸에서 트란스발 보어들이 발포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1] 피에트 크로녜 장군이 이끄는 보어 코만도는 이 소규모 충돌을 시작으로, 1880년 12월 20일 브롱크호르스트슈프루이트 전투에서 영국군 호송대를 매복 공격하여 섬멸했다. 1880년 12월 22일부터 1881년 1월 6일까지 트란스발 전역의 영국군 주둔지는 포위되었다.
일반적으로 전쟁이라고 불리지만, 실제 교전은 양측의 참여 인원과 전투 기간(약 10주)이 짧아 상대적으로 소규모였다.
1880년 12월 20일, 브롱크호르스트슈프루이트 전투에서 영국군 필립 로버트 안스트러 중령과 제94 보병 연대(코노트 레인저스) 병사들은 프레토리아의 보어 반란 진압을 위해 이동 중이었다. 이들은 브롱크호르스트슈프루이트 근처에서 보어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고, 첫 발포 후 수 분 만에 약 12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보어군의 손실은 사망 2명, 부상 5명이었다. 안스트러 중령은 프레토리아에서 약 61.15km 떨어진 브롱크호르스트슈프루이트에서 보어 코만도 부대에게 저지당했다.[3] 보어 지도자 프란스 요베르트(Francois Gerhardus Joubertaf, 피에트 요베르트 장군의 형제)는 영국군의 추가 진격을 전쟁 행위로 간주하고 후퇴를 명령했지만, 안스트러는 거부하고 탄약 분배를 명령했다. 보어군은 발포했고, 매복에 걸린 영국군은 궤멸되었다. 영국군은 56명이 사망하고 92명이 부상당했으며, 대부분의 병사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자 안스트러는 항복을 명령했다.[3]
보어 반란은 트란스발 전역에 산재한 6개의 작은 영국 요새들을 기습했다. 불규칙군을 포함하여 약 2,000명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동쪽의 라이덴버그에는 50명 미만의 병사만 있었다. 고립된 요새들은 포위 공격에 대비하고 구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881년 1월 6일까지 보어군은 라이덴버그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다른 다섯 개의 요새들은 서로 최소 약 80.47km 이상 떨어져 있었는데, 남쪽에는 바커스트룸과 스탠더튼, 북쪽에는 마라바스타드(Polokwane영어), 서쪽에는 포체프스트룸과 루스텐버그에 위치해 있었다. 보어군은 1880년 12월 29일 마라바스타드 요새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주요 교전은 라잉스넥 전투(1881년 1월 28일), 슈인스호그테 전투(1881년 2월 8일), 마주바 언덕 전투(1881년 2월 27일)로, 모두 약 약 25.75km 이내의 거리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들은 콜리가 포위된 요새들을 구원하려는 시도의 결과였다. 증원은 2월 중순까지 도착하지 않았지만, 콜리는 수비대가 버틸 수 없다고 확신하여 뉴캐슬에서 1,200명 규모의 구원 부대(나탈 야전군)를 소집했다. 콜리의 부대는 기병이 거의 없어 불리했지만, 1881년 1월 24일 라잉스넥으로 진군하여 바커스트룸과 스탠더튼을 구원하려 했다.
라잉스넥 전투 전, 영국군 사령관 조지 콜리 경은 1881년 1월 23일 피에트 요베르트에게 부대 해산을 요구하며 "당신은 교육을 잘 받았고... 싸움이 얼마나 희망이 없는지... 알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콜리는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1,400명의 병력, 80명의 해군 부대, 포병 및 개틀링 건으로 구성된 네이탈 야전군을 이끌고 라잉스넥으로 향했다.[4] 1881년 1월 28일, 콜리 중장이 이끄는 네이탈 야전군은 드라켄스버그 산맥의 보어 진지를 돌파하려 했으나, 피에트 요베르트가 지휘하는 보어 군에게 격퇴당했다. 영국군은 480명이 참전하여 150명의 사상자를 냈고, 보어 군의 저격수들은 많은 고위 장교들을 사상시켰다.
1881년 2월 8일 슈인스호그테 전투(당근 전투)에서 영국군은 궤멸을 면했다. 콜리 장군은 마운트 프러스펙트에서 네이탈 야전군과 합류하여 피난처를 찾았다. 2월 7일 뉴캐슬로 향하던 우편 호송대가 보어군의 공격을 받자, 콜리는 보급로 확보를 위해 직접 우편 마차를 호위했다. 보어군은 인고고 강 도하 지점에서 호송대를 공격했고, 영국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투는 수 시간 동안 계속되었지만 보어군 저격수들이 전투를 지배하여 콜리 장군과 부대는 마운트 프러스펙트로 후퇴했다. 영국군은 139명의 장교와 병사를 잃었고, 콜리는 많은 부상자들을 방치해야 했다. 10일 만에 야전군의 4분의 1을 잃은 퍼시벌 마를링 중위는 "이런 피르로스의 승리가 한두 번 더 있다면 우리는 군대 전체를 잃을 것이다"라고 적었다.[4]
2월 12일, 콜리는 제92보병연대(고든 고지대 연대) 등의 증원군을 받았고, 에블린 우드 경의 지휘하에 더 많은 병력이 오고 있었다. 2월 14일, 파울 크루거의 제안으로 평화 협상이 시작되어 전투 행위가 중단되었다. 영국 정부는 회유적이었지만, 콜리는 이를 비판하고 다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1881년 2월 27일 마주바 언덕 전투의 참사로 이어졌다.
1881년 2월 26일, 콜리는 제92 고지랜드 연대, 제58 연대, 네이탈 여단 소속 약 4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야간 행군하여 마주바 언덕 정상에 도착했다.[1] 병력은 포병대를 데려가지 않았다. 새벽, 고지랜드 병사들은 정상에서 보어군에게 존재를 알렸다. 보어군은 사각지대를 이용하여 산을 공격했고, 정확한 사격과 자연 지형을 활용하여 영국군 진영으로 진격했다. 여러 보어 부대가 언덕을 돌격하여 영국군을 몰아냈고, 공황 상태에 빠진 영국군은 언덕 아래로 도망쳤다.
영국군은 92명이 사망하고 134명이 부상당했으며 59명이 포로로 잡혔다. 콜리 소장도 사망했는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하다가 머리에 치명상을 입었다. 보어군은 6명이 부상을 입었고 그중 1명이 사망했다.[1] 30분 만에 영국군은 정상에서 몰락했다. 마주바의 패배는 이산들와나 전투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고, 제2차 보어 전쟁 당시 영국군의 구호 중 하나가 "마주바를 기억하라"였다.
1881년 3월 6일 휴전이 선포될 때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 콜리의 예상과 달리 트란스발 요새들은 견뎌냈고, 포위 공격은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보어들은 굶주림과 질병이 영국군을 괴롭히기를 기다렸다. 산발적인 교전으로 요새들은 경미한 사상자만 발생했는데, 포체프스트룸에서는 24명, 프리토리아에서는 17명이 사망했다.
4. 1. 보어군의 전술과 무기
보어인들은 강한 독립성을 가지고 있어 정규군이 없었다. 위험이 닥치면 지역의 모든 남자들이 코만도라는 군사 부대로 조직된 민병대를 구성하고 장교를 선출했다. 코만도는 민간인 민병대였기 때문에 각자 원하는 옷을 입었는데, 보통 어두운 회색, 중립적인 색상 또는 갈색 계열의 카키색 농장 일을 할 때 입는 재킷, 바지, 헌팅 모자와 같은 평상복이었다. 각자 사냥용 소총을 비롯한 자신의 무기와 말을 가져왔다. 코만도를 구성한 평범한 보어 시민들은 거의 평생을 말을 타고 지낸 농부들이었고, 고기는 말과 소총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숙련된 사냥꾼이자 명사수였다.[2]보어들은 대부분 단발식 후장식 소총을 사용했는데, 주로 0.450 웨스트리 리차드(웨스트리 리차드스)였다. 이것은 정확도가 최대 600야드에 달하는 낙하 블록 단동 후장식 소총이었다.[2] J. 레만의 1972년 저서 "제1차 보어 전쟁"에서는 "주로 매우 우수한 후장식 웨스트리 리차드스(구경 45; 종이 탄약; 젖꼭지에 수동으로 뇌관을 교체)를 사용하여 영국군이 지평선에 노출되는 것을 매우 위험하게 만들었다"라고 언급했다.[3] 다른 소총으로는 마르티니-헨리와 스나이더-엔필드가 있었다. 윈체스터나 스위스 베테를리와 같은 연발총을 소유한 사람은 소수였다. 보어인들은 사냥꾼으로서 은폐물에서 엎드린 자세로 사격하고 첫 발을 정확하게 하는 법을 배웠는데, 이는 빗나가면 재장전하는 동안 사냥감이 이미 사라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 모임에서는 종종 100야드 이상 떨어진 기둥에 얹어 놓은 닭고기 알을 표적으로 사용하여 사격 대회를 열기도 했다. 보어 코만도는 탁월한 경기병이 되어, 영국군에게 정확하고 파괴적인 사격을 할 수 있는 모든 은폐물을 활용할 수 있었다.[2]
4. 2. 영국군의 전술과 무기
제1차 보어 전쟁 당시 보어군은 정규군이 없었고, 위험이 닥치면 코만도라는 민병대를 조직해 대응했다. 이들은 각자 원하는 평상복(주로 카키색 계열의 농장 작업복)을 입고, 개인 소유의 사냥용 소총과 말을 가져왔다. 평생을 말을 타고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했기에, 보어인들은 숙련된 사냥꾼이자 명사수였다.[4]보어인들은 주로 단발식 후장식 소총인 0.450 웨스트리 리차드를 사용했는데, 이 총은 최대 600야드까지 정확도를 보였다.[4] 마르티니-헨리, 스나이더-엔필드 소총도 사용되었고, 윈체스터나 베테를리 같은 연발총을 가진 사람은 소수였다. 보어인들은 은폐, 엄폐 사격에 능숙했으며, 마을 모임에서는 100야드 이상 떨어진 닭고기 알을 맞추는 사격 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들은 뛰어난 경기병으로서 영국군에게 정확하고 파괴적인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4]
반면, 당시 영국 보병은 아프리카 풍경과 대조되는 빨간색 재킷과 감색 바지, 흰색 피헬멧을 착용했다. 하일랜더 부대는 킬트와 카키색 군복을 입었다. 영국군의 표준 무기는 긴 검 총검이 장착된 마르티니-헨리 단발식 후장식 소총이었고, 영국 왕립 포병은 파란색 재킷을 입었다. 보어 저격수들은 원거리에서 영국군을 쉽게 저격할 수 있었다. 보어군은 총검을 휴대하지 않아 근접전에는 약했지만, 이를 최대한 피했다. 영국군은 지휘, 훈련, 편대, 동시 사격력 등 전통적인 군사적 가치를 중시한 반면, 보어군은 수많은 아프리카 부족과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기동성, 은밀성, 사격술, 주도권에 더 의존했다. 평균적인 영국 병사는 사격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고, 주로 소대 단위의 집단 사격 훈련을 받았다.[4]
4. 3. 주요 전투
전쟁의 발단은 피에트 베주이덴하우트라는 보어인이 불법적으로 부풀려진 세금을 내기를 거부한 데서 비롯되었다.거하르드민네브론af 1880년 11월 11일, 정부 관리들은 그의 마차를 압류하여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경매에 부치려 했지만, 무장한 보어인 100명이 경매를 방해하고 재판장을 폭행하여 마차를 되찾았다. 이들이 뒤쫓아온 정부군과 맞서 싸우면서 전쟁의 첫 포성이 울렸다.
트란스발이 공식적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후, 1880년 12월 16일 포체프스트룸에서 트란스발 보어들이 발포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1] 이 소규모 충돌에서 보어 코만도는 피에트 크로녜 장군이 이끌었다.[1] 이는 1880년 12월 20일 브롱크호르스트슈프루이트 전투로 이어졌는데, 이곳에서 보어들은 영국군 호송대를 매복 공격하여 섬멸했다. 1880년 12월 22일부터 1881년 1월 6일까지 트란스발 전역의 영국군 주둔지는 포위되었다.
일반적으로 전쟁이라고 불리지만, 실제 교전은 양측의 참여 인원과 전투 기간이 10주 정도로 짧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상대적으로 소규모였다.
강한 독립성을 가진 보어들은 정규군이 없었다. 위험이 닥치면 지역의 모든 남자들이 코만도라는 군사 부대로 조직된 민병대를 구성하고 장교를 선출했다. 코만도는 민간인 민병대였기 때문에 각자 원하는 옷을 입었는데, 보통 어두운 회색, 중립적인 색상 또는 갈색 계열의 카키색 농장 일을 할 때 입는 재킷, 바지, 헌팅 모자와 같은 평상복이었다. 각자 사냥용 소총을 비롯한 자신의 무기와 말을 가져왔다. 코만도를 구성한 평범한 보어 시민들은 거의 평생을 말을 타고 지낸 농부들이었고, 고기는 말과 소총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숙련된 사냥꾼이자 명사수였다.
대부분의 보어들은 단발식 후장식 소총을 사용했는데, 주로 0.450 웨스트리 리차드(웨스트리 리차드스)였다. 이것은 정확도가 최대 약 548.64m에 달하는 낙하 블록 단동 후장식 소총이었다.[1] J. 레만의 1972년 저서 "제1차 보어 전쟁"은 "주로 매우 우수한 후장식 웨스트리 리차드스(구경 45; 종이 탄약; 젖꼭지에 수동으로 뇌관을 교체)를 사용하여 영국군이 지평선에 노출되는 것을 매우 위험하게 만들었다"라고 언급했다.[2] 다른 소총으로는 마르티니-헨리와 스나이더-엔필드가 있었다. 윈체스터나 스위스 베테를리와 같은 연발총을 소유한 사람은 소수였다. 사냥꾼으로서 그들은 은폐물에서, 엎드린 자세로 사격하고 첫 발을 정확하게 하는 법을 배웠다. 마을 모임에서는 종종 약 91.44m 이상 떨어진 기둥에 얹어 놓은 닭고기 알을 표적으로 사용하여 사격 대회를 열었다. 보어 코만도는 탁월한 경기병이 되어, 영국군에게 정확하고 파괴적인 사격을 할 수 있는 모든 은폐물을 활용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 보병 군복은 빨간색 재킷, 측면에 빨간색 파이핑이 있는 감색 바지, 흰색 피헬멧과 파이프 클레이 장비였는데, 아프리카 풍경과는 대조적이었다. 하일랜더들은 킬트와 카키색 군복을 입었다(그들은 방금 제2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다). 표준 보병 무기는 긴 검 총검이 장착된 마르티니-헨리 단발식 후장식 소총이었다. 영국 왕립 포병의 포병들은 파란색 재킷을 입었다. 보어 저격수는 원거리에서 영국군을 쉽게 저격할 수 있었다. 보어들은 총검을 휴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접전에서 상당한 불리함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가능한 한 피했다. 수많은 아프리카 부족과의 국경 스커미시에서 얻은 수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은 기동성, 은밀성, 사격술, 주도권에 더 의존했지만, 영국군은 지휘, 훈련, 편대, 동시 사격력이라는 전통적인 군사적 가치를 강조했다. 평균적인 영국 병사는 사격 훈련을 받지 못했고, 사격 연습도 거의 하지 않았다. 영국군이 받은 사격 훈련은 주로 명령에 따라 소대 단위로 집단 사격하는 것이었다.
1880년 12월 20일, 브롱크호르스트슈프루이트 전투에서 영국군 중령 필립 로버트 안스트러와 제94 보병 연대(코노트 레인저스) 소속 병사들은 프레토리아의 보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그들은 브롱크호르스트슈프루이트 근처에서 보어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고, 첫 발포 후 수 분 만에 약 120명이 보어군의 사격으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보어군의 손실은 사망 2명, 부상 5명이었다. 주로 아일랜드 병사들로 구성된 이 연대는 안스트러 중령의 지휘 아래 프레토리아를 향해 서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는데, 보어 코만도 부대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들은 프레토리아에서 약 61.15km 떨어진 브롱크호르스트슈프루이트에 접근했을 때 저지당했다.[3] 보어 지도자 프란스 요베르트(코만단트, Francois Gerhardus Joubertaf, 피에트 요베르트 장군의 형제)는 안스트러와 그의 부대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하며, 이 지역이 다시 보어 공화국이 되었으므로 영국군의 추가 진격은 전쟁 행위로 간주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스트러는 거부하고 탄약 분배를 명령했다. 보어군은 발포했고, 매복에 걸린 영국군은 궤멸되었다. 이어진 교전에서 영국군은 56명이 사망하고 92명이 부상을 입었다.[3] 대부분의 병사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자, 죽어가던 안스트러는 항복을 명령했다.
보어 반란은 트란스발 전역에 산재한 6개의 작은 영국 요새들을 기습했다. 이 요새들에는 불규칙군을 포함하여 약 2,000명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동쪽의 라이덴버그에는 50명 미만의 병사만 주둔하고 있었다. 안스트러는 바로 이곳을 떠났었다. 고립되어 병력이 부족했던 모든 요새들은 포위 공격에 대비하고 구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881년 1월 6일까지 보어군은 라이덴버그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다른 다섯 개의 요새들은 서로 최소 약 80.47km 이상 떨어져 있었는데, 남쪽에는 바커스트룸과 스탠더튼, 북쪽에는 마라바스타드(Polokwane영어), 서쪽에는 포체프스트룸과 루스텐버그에 위치해 있었다. 보어군은 1880년 12월 29일 마라바스타드 요새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이 전쟁의 세 가지 주요 교전은 모두 약 약 25.75km 이내의 거리에 있었는데, 라잉스넥 전투(1881년 1월 28일), 슈인스호그테 전투(1881년 2월 8일), 마주바 언덕 전투(1881년 2월 27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전투들은 콜리가 포위된 요새들을 구원하려는 시도의 결과였다. 그는 증원을 요청했지만, 증원은 2월 중순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콜리는 수비대가 그때까지 버틸 수 없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트란스발 국경 근처 뉴캐슬에서 그는 이용 가능한 병력으로 구원 부대(나탈 야전군)를 소집했지만, 그 규모는 겨우 1,200명에 불과했다. 콜리의 부대는 기병이 거의 없어 지형과 그러한 유형의 전투에 심각한 불리함을 안고 있었다. 대부분의 보어 병사들은 기병이었고 숙련된 기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리의 부대는 1881년 1월 24일 라잉스넥을 향해 북쪽으로 진군하여 가장 가까운 요새인 바커스트룸과 스탠더튼을 구원하기 위해 출발했다.
라잉스넥 전투가 시작되기 전, 영국군 사령관 조지 콜리 경은 1881년 1월 23일 보어 전쟁 지휘관 피에트 요베르트에게 그의 부대를 해산하거나 대영제국의 전력에 맞설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지하며, 자국 이외의 어떤 것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교육을 잘 받았고 여행도 많이 했으므로, 당신이 시작한 싸움이 얼마나 희망이 없는지, 그리고 우연히 얻은 어떤 성공이라도 궁극적인 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없는지 알 수밖에 없습니다."
콜리는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1,400명의 병력, 80명의 해군 부대, 포병 및 개틀링 건으로 구성된 네이탈 야전군을 이끌고 네이탈-트란스발 국경의 산악 지대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라잉스넥으로 향했다.[4] 1881년 1월 28일 라잉스넥 전투에서, 조지 포머로이 콜리 중장이 이끄는 네이탈 야전군은 기병과 보병 공격으로 드라켄스버그 산맥의 보어 진지들을 돌파하여 포위된 영국군을 구출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피에트 요베르트가 지휘하는 보어 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격퇴당했다. 영국군 480명이 참전하여 150명의 사상자를 냈다. 게다가 보어 군의 저격수들은 많은 고위 장교들을 사상시켰다.
1881년 2월 8일 슈인스호그테 전투(당근 전투로도 알려짐)에서 또 다른 영국군이 간신히 궤멸을 면했다. 콜리 장군은 증원을 기다리기 위해 남쪽으로 약 4.83km 떨어진 마운트 프러스펙트에 있는 네이탈 야전군과 합류하여 피난처를 찾았다. 그러나 콜리 장군은 곧 다시 전투에 참여했다. 2월 7일 뉴캐슬로 향하던 우편 호송대가 보어군의 공격을 받아 마운트 프러스펙트로 밀려났다. 다음 날 콜리는 보급로와 통신로를 확보하려는 결의를 가지고 직접 우편 마차를 호위했고, 이번에는 더 큰 호위대를 거느렸다. 보어군은 인고고 강 도하 지점에서 호송대를 공격했는데, 약 400명의 더 강력한 병력이었다. 영국군의 화력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전투는 수 시간 동안 계속되었지만 보어군 저격수들이 전투를 지배하여 어둠이 깔리고 폭풍이 몰아치자 콜리 장군과 그의 부대는 마운트 프러스펙트로 후퇴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139명의 장교와 병사를 잃었는데, 이는 우편 호송대 호위 임무를 맡았던 원래 병력의 절반에 해당했다. 콜리는 많은 부상자들을 버려두고 방치되어 죽게 내버려 두어야 했다. 10일 만에 그는 야전군의 4분의 1을 사상자로 잃었다. 당시 퍼시벌 마를링 중위는 "이런 피르로스의 승리가 한두 번 더 있다면 우리는 군대 전체를 잃을 것이다"라고 적었다.[4]
2월 12일, 콜리는 제92보병연대(고든 고지대 연대), 제15(킹스 휘사르) 연대, 제6(이니스킬링) 드라군 연대, 제83(더블린 카운티) 연대로 구성된 증원군을 받았고, 에블린 우드 경의 지휘하에 더 많은 병력이 오고 있었다. 2월 14일, 파울 크루거의 제안으로 시작된 평화 협상의 결과를 기다리며 전투 행위가 중단되었다. 이 기간 동안 콜리 장군이 약속했던 증원군이 도착했고, 더 많은 병력이 뒤따를 예정이었다. 한편 영국 정부는 왕립 위원회 조사와 가능한 병력 철수를 제안했고, 보어에 대한 태도는 회유적이었다. 콜리는 이러한 입장을 비판했고, 크루거의 최종 합의를 기다리는 동안 영국 정부가 우위에서 협상할 수 있도록 다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1881년 2월 27일 마주바 언덕 전투의 참사로 이어졌고, 이는 영국군에게 있어 가장 큰 패배였다. 영국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살당했다.
1881년 2월 26일, 콜리는 제92 고지랜드 연대, 제58 연대, 그리고 네이탈 여단 소속 약 4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야간 행군을 감행했다. 그들은 보어군 주요 방어 지역을 내려다보는 마주바 언덕 정상에 도착했다.[1] 병력은 포병대를 데려가지 않았다. 새벽이 되자 고지랜드 병사들이 정상에 서서 주먹을 흔들며 아래 보어군에게 고함을 지르며 그들의 존재를 알렸다. 보어군은 영국군이 정상을 점령한 것을 보고 사각지대를 이용하여 산을 공격했다. 보어군은 정확하게 사격하며 이용 가능한 모든 자연 지형을 활용하여 영국군 진영으로 진격했다. 여러 보어 부대가 언덕을 돌격하여 영국군을 몰아냈다. 공황 상태에 빠진 영국군 병사들은 후방으로 질주하다가 언덕 아래로 도망쳤다.
영국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92명이 사망하고 134명이 부상당했으며 59명이 포로로 잡혔다. 콜리 소장도 사망자에 포함되었는데, 그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하다가 머리에 치명상을 입었다. 보어군은 6명이 부상을 입었고 그중 1명이 사망했다.[1] 30분 만에 영국군은 정상에서 몰락했다. 영국에게 마주바의 수치는 이산들와나 전투보다 더욱 컸다. 제92 고지랜드 연대와 같은 정예 부대가 보어 비정규군 앞에서 궤멸되었다. 이 패배는 그 영향이 매우 커서 제2차 보어 전쟁 당시 영국군의 구호 중 하나가 "마주바를 기억하라"였다.
1881년 3월 6일 휴전이 선포될 때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조건은 콜리가 비웃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콜리의 예상과 달리 트란스발 요새들은 견뎌냈고, 포위 공격은 대체로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보어들은 굶주림과 질병이 영국군을 괴롭히기를 기다렸다. 산발적인 교전의 결과로 요새들은 경미한 사상자만 발생했는데, 포체프스트룸에서는 24명, 프리토리아에서는 17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각각 보어 진지에 대한 간헐적인 습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5. 1881년 평화 협상
1886년 프레토리아 남쪽 약 약 48.28km 떨어진 휘트워터스랜드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영국의 제국적 이익이 다시 불붙었다. 이 지역은 세계 최대의 금광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는 어려움을 겪던 트란스발을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의 패권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위협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 독일과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5. 1. 영국의 휴전 제안과 프레토리아 조약

윌리엄 글래드스톤 총리 휘하의 영국 정부는 추가적인 조치에 상당한 병력 증강이 필요하며, 전쟁이 비용이 많이 들고 혼란스러우며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깨닫고 화해적인 태도를 취했다. 먼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던 영국 정부는 휴전을 명령했다.
콜리의 후임인 이블린 우드 경은 1881년 3월 6일에 전쟁을 종식시키는 휴전 협정에 서명했고, 그 후 3월 23일 오닐 코티지에서 크뤼거와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났다. 최종 평화 조약인 프레토리아 조약은 3인의 왕립위원회가 협상했으며, 영국은 영국 종주권하에 트란스발에서 보어인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하는 데 동의했다. 보어인들은 여왕의 명목상 통치와 영국의 대외 관계, 아프리카 문제, 원주민 지역에 대한 통제를 받아들였다.
프레토리아 조약은 1881년 8월 3일에 체결되었고, 10월 25일에 트란스발 민중평의회(의회)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 협정은 트란스발의 독립을 완전히 회복시키지는 않았지만, 영국의 종주권하에 남겨두었다. 영국군이 철수했고, 1884년 프레토리아 조약은 런던 조약으로 대체되었는데, 이 조약은 완전한 독립과 자치를 보장했지만 여전히 영국의 외교 관계 통제는 유지되었다.
5. 2. 런던 조약 (1884년)
윌리엄 글래드스톤윌리엄 글래드스톤 총리 휘하의 영국 정부는 추가적인 조치에는 상당한 병력 증강이 필요하며, 전쟁이 비용이 많이 들고 혼란스러우며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깨닫고 화해적인 태도를 취했다. 먼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던 영국 정부는 휴전을 명령했다.[1]콜리의 후임인 이블린 우드 경이블린 우드은 3월 6일에 전쟁을 종식시키는 휴전 협정에 서명했고, 그 후 1881년 3월 23일 오닐 코티지에서 크뤼거와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났다.[1] 3인의 왕립위원회가 협상한 최종 평화 조약인 프레토리아 조약에서 영국은 영국 종주권하에 트란스발에서 보어인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하는 데 동의했다. 보어인들은 여왕의 명목상 통치와 영국의 대외 관계, 아프리카 문제, 원주민 지역에 대한 통제를 받아들였다.[1]
1881년 8월 3일에 체결된 프레토리아 조약은 10월 25일에 트란스발 민중평의회(의회)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 협정은 트란스발의 독립을 완전히 회복시키지는 않았지만, 영국의 종주권하에 남겨두었다. 영국군이 철수했고, 1884년 프레토리아 조약은 런던 조약으로 대체되었는데, 이 조약은 완전한 독립과 자치를 보장했지만 여전히 영국의 외교 관계 통제는 유지되었다.[1]
6. 전쟁의 결과 및 영향
제1차 보어 전쟁은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영국이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불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에 서명하게 된 최초의 갈등이었다. 라잉스 넥 전투는 영국 연대가 공식적인 연대기를 들고 전투에 참가한 마지막 경우가 되었다.
보어인들의 비정규전 전술, 사격술, 기동성만으로는 영국군의 큰 손실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영국군도 보어인들과 마찬가지로 후장식 소총(마티니-헨리 소총)을 장비했지만, 정규군이었고,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 부족민들과 같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에서 교활한 적과 싸운 경험이 있었다. 역사가들은 영국군 지휘부, 특히 조지 포머로이 콜리 소장의 열악한 정보와 부실한 통신을 주요 패인으로 지적한다.
라잉스 넥 전투에서 콜리는 보어인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보어군의 병력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받아 그 규모에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인고고 넥 전투는 예비군이 파견 중이었고, 콜리가 이미 보어군의 병력과 능력을 경험했던 점을 고려할 때 다소 무모했다. 전략가들은 공격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상황에서 호송대가 진행되었어야 했는지, 콜리 자신이 영국군 경비대를 지휘해야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왔다.
휴전 협상이 진행 중이었던 상황에서 마주바 언덕에서 공격을 개시하기로 한 콜리의 결정은 특히 전략적 가치가 제한적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무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어군의 진지 또한 정상에서 소총 사정거리 밖에 있었다. 마주바 언덕 전투가 시작된 후, 콜리의 지휘와 엄중한 상황에 대한 이해는 하루가 지나면서 악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헬리오그래프를 통해 마운트 프로스펙트에 있는 영국군에게 상반되는 신호를 보냈다.
6. 1. 영국의 패배와 트란스발의 독립
제1차 보어 전쟁은 영국 정부에게 재앙과 같은 결과로 끝났다. 영국은 1783년 미국 독립 전쟁 이후 반란에 패한 적이 없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트란스발이라고도 함)은 영국의 종주권 아래 독립 공화국으로 설립되었지만, 1884년 런던 조약에 따라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1885년, 위트워터스랜드 농장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외국인(대부분 영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발생했고,[3] 이는 트란스발과 영국 정부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대부분 영국 시민으로 구성된 이 새로운 노동력은 트란스발의 권력 균형을 위협했고, 이는 두 세력 간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1895년에는 세실 로즈와 레안더 스타르 제이미슨이 주도한 실패한 제이미슨 급습으로 인해 긴장이 더욱 심화되었다.[4] 결국 이러한 갈등은 1899년 제2차 보어 전쟁으로 이어졌다.6. 2. 제2차 보어 전쟁의 발발
1899년, 영국이 최후통첩을 거부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어 제2차 보어 전쟁이 발발했다.[1] 트란스발의 최후통첩은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1897년 이후 동맹) 간의 모든 분쟁을 중재를 통해 해결하고 영국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 금광에 대한 욕심은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막대한 자원과 비용을 투입할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18년 전 제1차 보어 전쟁에서 얻은 보어인들의 사격술, 전술적 유연성, 지형 활용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대부분 잊어버렸고, 결국 많은 사상자와 패배를 겪은 후에야 승리할 수 있었다.참조
[1]
서적
A history of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1558-1910)
https://archive.org/[...]
Holland
1910-01-01
[2]
학술지
The First Anglo Boer War
https://www.sahistor[...]
[3]
웹사이트
South African War {{!}} Definition, Causes, History, & Facts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2-14
[4]
뉴스
Origins of the conflict
https://nzhistory.go[...]
2023-02-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